해녀일기

거제해녀학교, 서류 합격 그리고 비운의 체력 시험

Jenny the Sea 2021. 5. 29.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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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녀학교의 탈락을 맛본 후,
어쩌면 내 길이 아닐까... 지금처럼 서울 한 구석의 직장인으로 뚜벅뚜벅 살아가는게 나의 운명인 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고된 물질을 하며 자식 농사 하시던 해녀 분들도 내자식은 좀 더 공부해서 몸이 힘들지 않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고 싶은 삶이셨을텐데 저는 반대로 다시 고된 노동을 찾아가려는 삶의 방향을 갖는 것이 맞을까 하고 말이죠. 또, 우물안 개구리처럼 도시에서 자란 내가, 풍랑처럼 험한 날 것 그대로의 생활을 견딜 수 있을지 자신감을 잃어가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만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이유는 두 가지였죠.


지난 1년여간 해녀학교만을 간절히 기다려왔는데 지금와서 포기하고 또 1년 여를 기다리기가 너무 아까웠고,
40-50대가 되어 퇴직을 하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 솔직히 두려웠습니다. 고생이 필요한 일이라면 늦었다고 생각한 지금 당장 시작하고, 60-70대가 되어서도 생활전선에서 여전히 생산적인 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어요.

또 탈락할 수 있겠지만 배움 삼아 내년에 다시 도전하면 되니 기운을 차리고! 거제해녀학교 6기 교육생 모집의 신청서를 작성 하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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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에는 서류 통과 즉, 체력검증 및 면접 인원을 48명으로 한정할 예정이라고 안내되어 있었습니다. 공지글의 조회수가 300을 훌쩍 넘어가는 상황에서 긴장감이 배가 되었지요.

제주에서의 실패를 교훈삼아 이번에는 두 가지를 명확히 준비하기로 하였습니다.
단순히 바다에 대한 로망이 아닌 해녀가 되고 싶은 구체적인 동기와 실제 이주 및 나잠업에 임할 현실적인 계획을 말이죠.

신청서를 작성한지 보름 후, 두근반 세근반 떨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고, 서류 통과라는 기쁜 소식을 받았습니다.


이제 남은 관문은 체력검증과 면접이었습니다.
서류 통과자는 48명이고 이 중의 절반인 24명만 교육생이 될 예정이라는 안내문을 받았지요. 체력 시험은 토요일에 예정되었고 면접은 그 다음날인 일요일에 개별적으로 시간 안내를 받을 예정이었습니다.

시험일인 5월 15일까지 컨디션 조절을 위해 하루하루 힘썼습니다. 특히나 수상 자격증 하나 없이 그냥 바다에 들어가 숨만 꾸벅꾸벅 참을 줄 아는 게 다였던 저였기에 건강끈기만큼은 증명하자 다짐했어요.

집에서 시험장인 거제 고현까지는 대략 430km가 나오더군요. 오전 10시에 시작하는 관계로 토요일 새벽 3시에 번개같이 눈을 떠 자차로 출발하였습니다.
도착하니 9시 좀 안되어 기지개를 펴고 주변을 둘러보았죠. 날씨가 너무 좋은 게 문제였던(?) 제주 면접일과 다르게, 이날은 비가 계속 내리는 데다 마음까지 오싹해 사진 한장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바다는 제법 잔잔하여 체력 시험은 그대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조와 순서를 고지받고 챙겨간 장비를 착용하였지요. 개인 장비가 없는 경우에는 대여도 해주었습니다. 체력시험은 바다 한쪽에 설치해 둔 라인을 따라 가능한 만큼 잠영이나 다른 영법을 이용해 건너는 것이었어요.

저는 물려 받은 낡은 수트와 오리발이 전부였는데 옆을 보니 프리다이빙용 롱핀에 좋은 수트까지, 전문 다이빙 장비를 화려하게 갖추신 분들이 속속 모이더랍니다... 내가 과연 이 안에서 좋은 결과를 보일 수 있을까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했죠. 만약 날씨까지 좋았다면 너무 긴장했을텐데 마침 비가 내려 다소나마 차분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습니다.

헝그리한 중고 장비


바다 수영을 취미로 하시는 분들이 앞서 당당하게 헤엄쳐 건너는 모습을 보며 몇번 낙담하고 있으니 제 순서가 금새 다가왔습니다.
다행히도 물은 춥지 않았고 물 속 시야도 나쁘지 않았어요. 기분좋게 라인을 따라 헤엄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숨을 고르기 위해 고개를 한번 들어보니 이럴수가.

어느새 저는 라인 밖 먼 바다로 헤엄쳐 와있었습니다...

너무 창피하고 당황스러우니 되려 웃음만 나는데 꾹 참고 다시 라인 안쪽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왠지 모든 시선이 저를 향한 것 같고 얼마나 우스웠을까- 싶었는데 어쩌겠어요. 이미 지나버린 일을... 멋쩍게 수상요원을 지나 뭍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고요합니다. 빗소리마저 없었다면 이 민망함을 감출 수 없었을 듯 해요ㅎㅎ

그렇게 짧았지만 강렬했던 체력검증이 끝나고 면접은 다음날 오전으로 안내받았습니다. 참고로, 체력 검증 결과는 당락에 큰 영향을 끼치치 않는다고 설명해 주시며 실제로 수영을 하지 못하는 분들도 교육생이 많이 된다고 말씀해주시더군요. 그렇지만 시험을 본 입장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게 영 신경쓰일 수 밖에 없었네요.
별도의 샤워 시설은 없어 간이 탈의실에서 장비 벗고 물기만 닦은 채 시험장을 떠나면 되었습니다. 순서가 일찍인 관계로 오전에 끝이 나 가까운 장목항에 들러 바다도 구경하고 낚시도 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보았어요.

바다는 비 오는 날도 어쩜 이렇게 그림인지


안개 너머 섬이 보이는 그림같은 풍경 위로 여전히 추적추적 비가 내리며 제 마음같이 우중충하였네요. 그래도 오후가 되니 비가 그치고 햇빛이 조금씩 들어 위로 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난생 처음으로 성대도 낚아 보았어요ㅎㅎ

행운의 신호?!


이런 예쁜 물고기가 나같은 초보한테 다 잡히다니. 그래, 나한테도 볕들 소식이 있겠지!

이렇게나마 긍정적으로 거제에서의 하루를 마무리 해보기로 했습니다. 모쪼록 힘을 내야 다음날, 면접을 잘 마무리 할 수 있을테니 말이죠.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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